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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관계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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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성인소설: 관계 청산

[무료소설] 관계 청산

소녀를 재워줘


34. 관계 청산


나미를 끌어안은 채 단잠에 빠져 있던 태선은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는 손만 뻗어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 홍태선 교수님?


“네, 그런데요.”


- 안녕하십니까. 저는 장호철이라고 합니다. 잠깐 만나 뵀으면 합니다.


어딘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태선은 그의 청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일이시죠?”


- 박향미 학장의 일입니다. 결코 홍 교수님 입장에서 손해 보는 만남은 아닐 것입니다.


태선은 직감적으로 향미와 그의 관계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시죠. 어디서 뵐까요?”


*


느지막이 학교로 출근한 태선은 자신의 출입증이 학교 입구에서부터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태선은 결국 하는 수 없이 손님 출입증을 얻어 간신히 학교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수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연구실 문은 잠겨 있었고, 개인 소지품은 전부 박스에 담겨 바깥 복도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태선은 어이없는 얼굴로 곧장 발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가 도착한 곳은 향미의 집무실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를 내자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태선은 한숨을 꾹 눌러 참으며 한 번 더 노크를 했다.


- ……들어와.


뒤늦게 향미의 피곤에 젖은 음성이 들려왔다. 태선은 깊은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어제와 같은 차림으로 소파 상석에 앉아 눈을 가린 채 기대고 있었다. 태선은 항상 앉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제 출입증이며 연구실까지 전부 차단됐던데요.”


“……응.”


“학교 그만 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나를 그렇게 개망신 줘놓고 계속 내가 주는 걸 누리면서 살아갈 생각이었어?”


향미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완전히 텅 비어 버려 공허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만 두겠습니다.”


설마 태선이 이렇게 순순히 그만둔단 소리를 할 줄은 몰랐기에 향미의 미간이 좁아졌다.


“진심이야? 네가 여태까지 이룬 것들 전부 다 이대로 놓을 거라고?”


“네. 학장님 말씀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요.”


“홍태선. 너 무슨 생각이야? 이 학교를 벗어난다고 해도 네가 맡을 교수 자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텐데?”


“……해외로 공부하러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아내 될 사람이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겠다네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술술 얘기하는 태선을 보며 향미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내 될 사람? 너 설마……?!”


“네. 지금 만나는 사람과 결혼합니다, 저.”


퍽!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향미는 옆에 있던 휴지 곽을 던져 버렸다. 태선의 가슴팍을 맞고 떨어진 그것을, 그는 무신경하게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어차피 한 번은 찾아뵀어야 했는데, 인사는 이것으로 대신하죠.”


“홍 교수! 야, 홍태선!!!!”


“감사하단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동안 저는 제 몸을 드리는 대가를 받아왔던 것뿐이니까요. 이제 거래는 종료된 거고요.”


“너 내가 이대로 가만 둘 것 같니?!”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저도 학장님이 그동안 저한테 사람을 붙여 감시했던 사실, 공론화 시킬 테니까요.”


“……!”


“장 실장이라는 사람, 꽤 유능하던데요. 덕분에 유용한 사람을 알게 됐네요.”


태선은 출근 전 만났던 장 실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가만히 있지 않을 박향미 때문이라도 장 실장 또한 보험이 필요했고 그는 그 보험으로 태선을 택했던 것이었다. 두 남자는 박향미의 일에 한해서 서로 공조하기로 약속했고, 태선은 그를 통해 그간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전부 알게 된 참이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나미 또한 분노를 참지 못했다. 태선에게 교수직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라고 권했던 것도 나미가 먼저였다. 오늘 아침 세 사람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모의를 나누었고, 그리하여 태선은 향미가 더는 두렵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끝까지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태선의 모습에 기어이 이성을 잃은 향미가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태선은 자신이 지난 2년간 그녀에게 받았던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저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학장님을 보는 게.”


“……!”


“안녕히 계세요, 박향미 학장님.”


“거기 서! 돌아와! 홍태선!! 당장 돌아와!!”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뒤 태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 버렸다. 분노와 경악에 찬 향미가 다시 오라며 발악하듯 소리쳤지만 그는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오늘은 태선에게 있어 해방의 날이었다.


*


짐을 챙겨 학교를 나온 태선은 모친이 입원한 병원으로 곧장 향했다. 오늘 그는 모친에게 나미와 정식으로 결혼할 생각이라 말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어머니의 반응을 예상하며 그가 병실 문을 연 순간, 모친의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여자의 모습에 그는 멈칫했다.


“……왔어?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닌가.”


태선이 이 시간에 올 줄 몰랐던 윤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어머니는 그녀가 깎아 준 사과를 든 채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 그러게. 지금 너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니냐?”


“……네가 왜 또 여기 있어.”


“또 라니. 지난번에 뵙고 처음 온 거야. 정말이야.”


“하아…….”


태선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는 다가와 어머니를 위해 사온 이런저런 물건들을 비치하며 윤정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태선과 윤정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운에 민망해진 복자가 아들을 불렀다.


“태선아.”


“엄마, 있다가 저녁 때 다시 올게요. 계세요.”


그가 자신 때문에 또 나가려 한다는 것에 윤정이 핸드백을 들고 일어났다.


“내가 지금 갈게. 대신 배웅 좀 해줘.”


“…….”


“어머니, 저 가볼게요.”


“……그래라.”


복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나란히 병실을 나서는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예쁘게 보기만 했던 저 아이들 사이에 대체 언제 저렇게까지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버린 것인지.


복자는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 도로 누웠다.


*


“박 교수랑은 어떻게 됐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복도를 걸어가며 윤정이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태선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렇잖아도 방금 끝내고 오는 길이야.”


“정말? 그렇게 쉽게 포기할 여자가 아닌데.”


“그 여자라고 모든 게 다 떳떳한 건 아니니까.”


“…하긴….”


윤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로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 결혼해서 한국 떠날까 해.”


병원 로비를 나서며, 태선이 마지막으로 윤정에게 말했다. 그녀는 놀란 얼굴을 했다.


“진심…이야…?”


“한국에 더 이상 미련이 없거든.”


“…….”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안중에 자신은 단 1%도 없다는 것이 느껴져 윤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되겠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든 그 순간.


“오빠!”


병원 건너편에서 나미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태선 또한 그녀를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다. 신호가 바뀌어 나미가 건너오는 그때-


자동차 한 대가 맹렬한 속도로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나미야!!!”


위험을 감지한 태선이 외마디 비명과 같은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미를 잡아당긴 그가 차에 치려는 순간, 누군가 거세게 그를 떠밀었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윤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를 친 차는 속도를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돌진하다, 끼이익,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가로수와 전봇대를 연이어 들이받고 간신히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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