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마음의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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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성인소설: 마음의 크기
[무료소설] 마음의 크기
소녀를 재워줘
26. 마음의 크기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거 놔!”
지환은 나미의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녀의 집으로 끌려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미는 자신의 집 거실까지 와서야 내팽개치듯 지환을 밀었다.
“너 진짜 왜 그래?!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나미의 새된 비명에 지환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새끼가 뭐라고 네가 죽어? 너 정말 돌았냐?!”
“하. 돈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뭐?!”
“누가 나 좋아해 달랬어? 내가 언제 너더러 나 지켜달라고 한 적이나 있어?! 왜 제멋대로 내 인생에 끼어들어서는 사사건건 참견 질에 시비야?!”
미친 듯 소리치는 나미의 모습에 지환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내가 이러는 게 너한테는 그냥 참견 질이고 시비일 뿐이야? 너보다 열 살 이상은 더 많은 남자한테 미쳐서 날뛰는 널 걱정하는 내가, 그냥 돈 걸로 보여?”
“어. 그냥 미친 싸사이코 스토커 같아. 내가 왜 한국 왔는데. 아무 미련도 없는 한국에 그것도 성공까지 해서 왜 돌아온 건데. 나 저 남자 다시 만나려고 온 거야. 내가 두고 간 저 남자! 다시 되찾고 싶어서!!!”
“…하….”
“근데 네가 뭔데 자꾸 끼어들어. 네가 내 뭐라도 돼? 우리 엄마가 오냐오냐, 예쁘게 봐주면서 내 경호원이나 해라, 하니까 정말 그런 거라도 된 것 같아?! 착각하지 마. 정작 나한테 1순위는 너도 아니고 우리 엄마도 아니고 저 사람이야. 난 저 사람한테 인생을 걸었다고.”
“……!”
나미가 태선을 그 정도까지 좋아하는 줄은 몰랐던 지환이 멍해졌다. 자신의 엄마보다도 태선이 우선이라니, 그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대체 내가 얼마나 더 너한테 경고해야 돼? 제발 선 넘지 말라고 했지. 너한테 줄 마음 같은 거 단 한 톨도 없다고, 설사 저 사람에 대한 내 사랑이 영원히 끝나버린다고 해도 너한테 갈 일은 죽어도 없을 거라고. 내가 이런 말까지 하면서 지긋지긋하니까 그만 좀 하라고 말로 해 줘야 돼? 너 원래 이렇게 눈치 없는 애였어?”
나미는 그동안 지환에게 쌓였던 것을 제대로 푸는 듯, 거의 폭주하다시피 독설을 퍼부었다. 저 정도로 자신에게 몸서리치는 나미를 보니 지환의 속에서도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야, 너도 진짜 너무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널 좋아한 게 얼만데…….”
“고작 1년? 그것도 어쩌다 우연히 외국에서 마주친 내 겉모습에 반해서?”
“…….”
“난 3년이야. 밑바닥인데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던 나를 돌봐준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네가 아니라 저 남자라는데, 네까짓 게 뭔데 저 사람 멱살을 잡아!”
지환은 나미가 여태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 철저히 외면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다 그 이유가 태선이라는 것도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가 나미에게 가진 마음의 크기는 나미가 태선에게 가진 마음의 크기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것없었던 것이다. 그 뼈아픈 사실이 지환에게 온전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기가 생긴 그는 어쩐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반나미.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포기 안 해. 네가 나한테 올 때까지,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거야.”
“……하! 그런 소린 군대나 다녀오고 말해 줄래?”
큰맘 먹고 한 자신의 고백에 팔짱을 끼고 조소하는 나미에게 지환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
점심시간. 태선은 향미의 부름을 받고 6강의동 503호를 찾아갔다. 나미는 오늘 연속 강의라 따로 점심 약속을 할 수 없었기에,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왔어? 우리 도시락 먹자, 오늘은.”
빈 강의실을 찾아 들어오는 태선을 반기며 향미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그녀와 종종 이런 식으로 교내에서 식사를 한 적 있기에 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학장님은 학교를 참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나?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냥……가끔 이렇게 굳이 빈 강의실을 찾아서 식사하시는 거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란 곳이 참 신비롭지 않아? 난 학교가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것 같아. 낮에는 그렇게 성스럽다가도, 밤만 되면 으슥하고, 또 은밀해지거든.”
태선은 향미의 취향을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전 잘 모르겠지만…그런 것도 같고….”
“어머. 홍 교수 학교 다닐 때 강의실에서 떡 안 쳐봤어?”
“켁, 켁! 쿨럭, 쿨럭! 네?”
멀쩡히 도시락을 먹던 태선은 향미의 파격적인 말에 사레가 들고 말았다. 목구멍에 걸린 밥알을 겨우 넘기고 급히 물을 마신 그는 놀랍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태선의 반응이 재밌기만 한 향미는 깔깔거리며 박장대소를 했다.
“자기 정말 순수하게 살았구나. 윤정이가 교내에서 한 번도 사까시 같은 거 안 해주디?”
“사, 사, 네?”
“자기 물건 한 번도 안 빨아줬냐구. 어휴, 학교를 무슨 재미로 다녔나 모르겠네.”
“……!”
태선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교내에서 그런 불경스런 짓을 저지른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한 일인데, 향미가 윤정을 아는 것도 모자라 자신과의 관계까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자기 윤정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거 모르는 줄 알았어?”
“……네. 윤정이를 알고 계신 것도 몰랐는데요, 전.”
“내가 그 애를 왜 몰라. 자기가 윤정이랑 결혼했다 이혼한 것도 아는 마당에, 그쯤이야.”
“…….”
“최근에 다시 홍 교수를 찾아온 것도 알고 있고.”
태연하게 물을 마시며 향미가 흘리듯 말했다. 그러나 확실히 들어버린 태선은 그동안 의심만 해왔던 것을 그녀의 말로 확신하게 되었다.
박향미는,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입맛이 확 떨어지는 건 순간이었다. 태선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먹은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 더 안 먹게?”
“……배부르네요.”
“은근히 자기도 입이 짧아. 뭐, 그래서 이렇게 슬림한 몸매가 유지되는 거겠지만.”
책상 위에 걸터앉은 바람에 허공에 다리가 살짝 떠 있던 향미의 발이 태선의 정강이를 타고 무릎까지 올라왔다. 스타킹으로 감싼 미끄러운 발가락이 스멀스멀 자신의 다리를 기어오르는 것이 꼭 벌레같이 느껴져 태선은 차오르는 혐오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향미는 은근하게 몸을 숙여오며 물었다.
“한 번 해보고 싶지 않아? 강의실에서.”
“……아뇨, 전 별로.”
“지금 거절하는 거야?”
태선에게서 부정적인 대답이 흘러나오자 향미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태선은 옅은 한숨을 내쉰 뒤 여전히 제 다리를 문지르는 그녀의 발을 붙잡아 원래의 자리로 내려놓았다.
“……네, 거절이에요.”
“…뭐…?”
2년 전, 스스로 자신이 있는 호텔 방을 찾아온 뒤로 태선은 늘 예스맨이었다. 그녀의 명령과 말은 절대적으로 복종했고 한 번도 제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농담처럼 벌어진 상황에 태선이 저토록 정색을 하고 나오니 향미로서도 어처구니가 없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점심 다 먹었으니, 저 먼저 이만 가 볼게요.”
“서.”
“…….”
돌아서 가는 태선의 등 뒤로 향미가 한 마디 했다. 좀 전까지 분명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건지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지금 내 앞에서 성질부리는 거야? 그래?”
“…하아….”
“홍태선.”
“……제가 어떻게 감히, 학장님 앞에서 성질을 부리겠어요.”
다시 향미를 향해 돌아선 태선이 억지로 웃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모습에 자극이 된 향미의 한쪽 입매가 비릿하게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