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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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성인소설: 고해
[무료소설] 고해
소녀를 재워줘
22. 고 해
윤정이 그렇게 떠난 후, 태선은 하루 종일 심란함에 휩싸여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가까스로 퇴근 시간을 맞춰 차에 올라탄 그가 시동을 거는 그 순간이었다.
“서프라이즈~!”
조수석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나미가 가볍게 뛰어들어 올랐다. 놀란 태선이 몸을 움찔하며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 깜짝이야. 나미야! 위험했잖아.”
“헤헤. 괜찮아요. 제가 얼마나 타이밍을 잘 보고 있었는데요. 아저씨 타는 거 보고 바로 탄 거란 말예요.”
“그래도. 앞으로 이런 장난치지 마. 응?”
행여 차를 곧바로 출발 시키기라도 했으면, 나미가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상황에 몸서리치며 태선이 그녀의 몸 곳곳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나미는 그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이 좋아 방긋 웃었다.
“내가 다치는 게 싫어요, 아저씨?”
“당연하지. 얼마나 놀랐는데. 심장이 아직도 쿵쾅거려.”
그의 말에 나미는 손바닥을 태선의 가슴팍에 갖다 댔다. 쿵, 쿵, 쿵, 쿵. 정말로 정신없이 빠르게 뛰는 심장에 나미는 천천히 그의 가슴을 문질렀다.
“괜찮아요, 저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아저씨 옆에 있잖아요.”
“하아……그래. 정말 다행이야.”
태선은 나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하루 종일 복잡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그녀로 인해 전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나미 또한 뭔가 평소와 그의 기분이 다른 것을 눈치 채고 말았다.
“아저씨?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거짓말. 솔직하게 말해 봐요, 오늘 무슨 일 있었죠?”
나미가 태선에게서 얼굴을 떼며 물었다. 자신을 응시하는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잠시 홀린 듯 바라보던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윤정이, 기억나니?”
“……아저씨 전 와이프.”
그녀의 이름은 나미에게도 썩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 여자가 태선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고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를 자신 또한 직접 봤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것일까.
“……결혼하고 쭉 해외에서 사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한국에 들어왔대.”
“갑자기 왜요?”
“……이혼했나 봐.”
태선은 윤정의 근황을 말하면서도 스스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윤정의 가정이 또다시 깨지고 말았단 사실을, 자신의 연인에게 고해야 하는 이 상황이 참으로 황당했다.
“……그래서, 아저씨한테 연락 왔어요?”
“아침부터 내 연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
“…하….”
나미 역시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잔 대체 무슨 염치로 또다시 태선을 찾아왔단 말인가. 정말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여자였다.
태선이 분노하는 나미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종일 기분이 안 좋았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그랬구나.”
“근데 너를 안으니까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어. 네가 내 피로회복제 맞나봐.”
태선의 부드러운 음성에 성 났던 나미의 마음도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더구나 제 존재가 그에게 그런 위로가 되었다니 그녀는 끝내 웃고 말았다.
“우리 저녁으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기분이 꿀꿀할 땐 맛있는 게 제일이야.”
“음, 그럴까?”
“제가 굉장한 맛집을 알아놨어요! 오늘은 우리 거기 가요.”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여느 보통의 연인들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
시끄러운 음악이 왕왕 울려 퍼지는 클럽 안. 그 깊숙한 곳 방안에는 윤정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깥이 연신 소란스럽고 왁자지껄할 때, 그녀가 있는 방은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웅웅, 거리는 소음과 함께 고요하기만 했다.
웨이터들이 몇 번이나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 방을 드나들었지만, 윤정은 전부 물렸다. 일행이 있다는 핑계였다. 대체 누가 오길래 여자 혼자 저 큰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직원들의 궁금증이 커질 무렵.
“혼자 여기서 뭐 하냐, 궁상맞게.”
석훈이 그녀가 있는 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윤정은 한쪽 입매를 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뭐 하긴, 술 마시고 있지.”
“너 아침부터 태선이한테 갔다며. 제정신이냐?”
“……촉새 같은 새끼. 그 새 태선이랑 통화했어?”
“네가 나한테 사기 쳤잖아. 태선이랑 연락 주고받는 척하면서 걔 학교 알아간 게 누군데.”
둘은 끊임없이 티격태격했지만 석훈이 자리에 앉자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는 윤정이었다.
“……태선이 많이 달라졌더라. 예전의 찌질이 홍태선이 아니던데?”
“참나. 그럼 사람이 언제까지 흙만 퍼먹고 살라는 법 있어? 여자만 한을 품으면 무서운 게 아니에요. 남자도 한 번 칼을 꺼내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거라고.”
“……그럼 태선이가 그만큼 달라진 게 다 나 때문이란 소리네? 맞지?”
윤정이 푸스스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녀의 말에 석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취했네, 취했어. 홍태선이 성공한 게 무슨 너 때문이야.”
“나한테 복수하려고 칼 갈았다는 거 아니야? 하아, 근데 어쩌지. 난 벌써 다 잃고 돌아왔는데.”
“다 잃기는 개뿔. 너 그 집안에서 나오면서 위자료 엄청나게 챙긴 거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 있을까봐?”
“마음이 텅 비었는데, 돈이라도 챙겨야지 그러면. 나한테 뭐가 남았다고.”
윤정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분명 처음에는 꽤 행복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남편과 사이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어서 결혼하고 3개월 만에 그녀는 임신이란 걸 했다. 모두의 축복과 쏟아지는 축하의 물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이란 응당 이런 것이어야 했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끝내 살아남지 못했고,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남편의 끝없는 외도와 그로 인한 불화, 오직 윤정에게만 침묵을 강요하는 시댁 등 그녀가 감당하기엔 하나같이 너무나 벅찬 것들뿐이었다. 물질적 풍요를 선택한 대신 자유를 박탈당한 윤정은 점점 살아갈 의욕을 잃었고, 결과는 이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나마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태선과 함께 보낸 추억들 때문이었다. 자신이 순수하고, 젊고, 눈부셨던 시기에 늘 옆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누구보다 저의 가치를 알아봐 주었던 남자가 태선이었는데.
윤정은 태선에 대한 그리움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애가 어지간히 뻔뻔해야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걔를 또 찾아 가냐?”
그러나 석훈이라고 해서 윤정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 중 누구에게 동정을 줄 거냐 묻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태선을 택할 거였으니까.
짧은 침묵 끝에 윤정이 물었다.
“……태선이 만나는 사람 있다던데, 누군지 알아?”
“……걔가 그렇게 말했어?”
석훈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자신이 알기로 태선은 윤정이 떠난 후로 박향미 말고는 누구와도 이성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설마 박향미를 제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그냥 눈앞의 여자를 치워버리려고 거짓말 한 걸지도.’
석훈의 표정을 살피던 윤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모르는 일이야? 석훈 씨 태선이랑 별로 안 친하구나? 맞지?”
“그래. 별로 안 친하니까 앞으로 나한테 태선이에 관한 거 물어보지 마.”
“치사해. 술값 석훈 씨가 내.”
“허……. 하여튼 있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석훈은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반쯤 녹은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깨물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