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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원치 않은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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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1,58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성인소설: 원치 않은 재회

[무료소설] 원치 않은 재회

소녀를 재워줘

21. 원치 않은 재회

지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아침 내내 휴대폰을 보며 실실 웃고 있는 나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벌써 제가 이렇게 쳐다본 게 얼만데, 그녀는 자신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결국 심통이 난 지환이 나미의 휴대폰을 슥, 뺏어갔다.

“야! 뭐 하는 거야, 이리 내!”

“하. 이제야 좀 쳐다봐 주네.”

나미는 그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가져간 휴대폰을 돌려달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지환은 심술궂게 큰 키를 이용해 더 높이 팔을 들었다. 나미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야! 너 진짜 뭐 하는 거야!”

“여기 뭐 꿀이라도 발라놨냐? 하루 종일 폰만 보게? 사람 옆에 있는데 개무시 하고.”

“내가 언제 무시를 했다고 그래. 너 빨리 안 내놔?!”

지환은 여태 나미가 보고 있던 게 무엇인가 싶어 그녀의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엔 태선과 나미가 나란히 누워 얼굴 팩을 하고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녀 혼자 찍힌 사진이 아니란 것에 지환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이 새끼 누구야?”

팩을 하고 있어 태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그가 나미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지환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윽!”

“미쳤나, 진짜. 너 나대지 말라고 내가 경고했지?”

갑작스레 전해진 통증에 지환의 허리가 풀썩 꺾였다. 나미는 그 틈을 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고이 가져왔다.
“야, 아, 반나미 너 진짜, 으윽…….”

“후. 적당히 해라. 다음엔 정강이 말고 다른 급소를 찰지도 몰라.”

나미는 차갑게 대꾸한 뒤 먼저 앞서 걸었다. 지환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이 나쁜 계집애. 야, 같이 가!”

*

전화기 너머로 전해온 갑작스런 석훈의 사과에 태선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 되었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 그게…… 실은 윤정이 있잖아.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에 태선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어, 말해.”

- 걔가, 몇 달 전에 이혼하고 이번에 한국 들어왔다는데.

“…….”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그의 연구실 앞, 결코 낯설지 않은 실루엣이 보였다.

- 난 당연히 너도 알고 있는 줄 알고, 윤정이한테 너네 학교 말했어. 아씨, 걔가 아주 태연하게 네 얘길 먼저 꺼내더라고. 난 둘이 이미 연락한 줄 알고, 나도 모르게 그만…….

여전히 전화기에서는 석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엔 언제나 당당했던, 그래서 그를 주눅 들게 했던 여자가 미소 지은 채 태선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는 전화를 끊지 않고 석훈에게 마저 물었다.

“……그랬더니, 뭐래.”

- 고맙다던데. 야, 걔가 설마 너 또 찾아가는 건 아니겠지? 지가 무슨 염치로…….

“……그런 게 없는 애야, 걘. 저기 벌써 와 있네.”

- 뭐? 김윤정이 왔어?

“끊는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태선은 굳어진 얼굴을 좀처럼 펴지도 못하고 그대로 걸어갔다. 연구실이 가까워질수록,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윤정 역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랬다. 그 김윤정이, 다시 돌아왔다.

*

“당신, 이 학교에서 꽤 유명하더라?”

“…….”

“길 가는 학생 아무나 붙잡고 철학과 홍태선 교수 아냐고 물어보니까, 눈을 빛내면서 연구실 여기라고 알려주던데?”

태선의 연구실을 둘러보던 윤정이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하필 이런 날 오전 수업도 없어서, 그는 전 아내와의 대면을 피할 수도 없었다. 태선은 별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차를 내렸다.

향긋하면서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차향이 실내에 퍼지자, 태선은 잔 두 개를 들고 테이블 앞에 놓인 소파로 가져와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윤정도 그제야 그를 따라 맞은편에 자리했다. 태선은 남은 잔 하나를 윤정의 앞에 내려놓았다.

“……차 마셔.”

“응, 고마워. 향기 되게 좋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은 없었다. 그들 중 언제나 말과 행동이 앞섰던 사람은 윤정이었기에, 그녀까지 침묵하자 더 그랬다. 조용히 차를 음미하는 소리만이 간간이 실내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무슨 일로 왔어?”

결국, 이 불편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태선이 물었다. 윤정은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일은 무슨. 언제 우리가 일이 있어야 만났나.”

“……이젠 좀 일이 있어야 만나야 하지 않을까. 허물없이 마주 볼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

“딱히 볼 일 없이 그냥 심심해서 온 거면, 차만 마시고 가. 그리고 앞으로 오려거든 연락이란 걸 미리 좀 해줬으면 좋겠다.”

태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윤정이 물었다.

“……연락하면, 받아주긴 할 거야?”

“아니.”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윤정은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하. 너 되게 매정해졌다.”

“그래? 매정하게 보였다니 다행이네. 이번에도 호구처럼 보일까 걱정했거든.”

“태선아.”

“이제 너 이러는 거, 전 전 남편인 나 말고 전 남편인 그 사람한테 가서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게 네 특기잖아.”

윤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홍태선을 저렇게 만들었나. 누구에게나 늘 다정하고 섬세하고 자상했던 남자를, 저토록 무감하고 차갑고 무심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를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하는 태선을 보고 있자니, 윤정은 제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인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하. 피곤하다. 난 너를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해. 그러니까 이젠 다시 보지 말자.”

태선은 손바닥으로 눈을 덮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삶은 언제나 버거웠고, 사정이 나아진 지금이라고 해서 버겁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나미를 되찾고 이제 겨우 웃어보나 싶었는데, 좋지 않은 기억들로 가득한 과거의 여자를 보니 마음은 더욱 심란했다.

“너, 나 많이 사랑했잖아.”

윤정이 울 듯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이던가. 태선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랬지, 한때는. 우린 너무 오랜 시간 붙어 있었으니까. 네가 내 인생의 마지막 여자일 거란 착각을 수도 없이 하던 때가 있었지.”

“…….”

“그런데 그게 벌써 언젠데. 난 너무 오래 돼서 기억도 잘 안 나는 것 같거든?”

“……지금은 그 마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태선이 손을 내리고 윤정을 똑바로 응시했다. 왜 이제 와서 저런 소리들을 지껄이는지 태선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나라고 언제까지 너만 보고 살 줄 알았어? 그렇게 병신 취급을 당했는데?”

“태선아, 제발…….”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 만나는 사람 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 이제 너라면 아주 지긋지긋하니까.”

“……!”

“그만 돌아가.”

태선이 소파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부서지는 자존심에 아랫입술을 깨문 윤정은 하는 수 없이 작은 클러치 백을 챙겼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걷는 게 힘든데도 야속한 그는 제게 눈길 하나도 주지 않았다.

“……갈게.”

짧은 한마디를 남겼는데도 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가려고 했던 윤정은 끝까지 냉정한 그의 뒷모습에 오기가 생기고 말았다.

“만나는 사람 있다고 했지? 계속 만나.”

“…….”

“기다릴 수 있으니까.”

“……!”

“네가 그랬던 것처럼 이젠 내가 널 기다릴게. 태선아, 우리가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생각해봐.”

윤정의 억지에 태선이 결국 뒤를 돌았다.

“그래봤자 전부 과거고, 다 지나간 시간들일 뿐이야.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제.”

“그 과거, 내가 다시 현재로 만들어줄게. 기대해. 나는 널 다시 찾고 말 거야.”

윤정은 마지막으로 선전포고를 날린 뒤, 태선의 연구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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