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의 일기장 (달라진 아침) 17화
무료소설 처제의 일기장: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처제의 일기장 (달라진 아침) 17화
17화)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시작된 아침을 맞는 상중의 기분은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어젯밤 그의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누워 자고 있는 도연을 보면서 앞으로 도연 모르게 지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꼬박 밤을 새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다. 지연의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상중 역시 지연에게로 향하고 있는 걸 거부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로 도연이 알지 못 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어머, 지금 몇 시예요, 여보? 우리 늦은 건가? 아닌데? 그런데 쟤가 왜 이 시간에… 야 너 무슨 일 있어?”
이른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도연과 상중이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데 지연이 문을 열고 나왔다.
도연이 놀라서 시간을 물어본 것은 당연했다. 지연이 상중의 집에 들어온 몇 달 동안, 지연이 그 시간에 얼굴을 내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부터 좀 부지런해지려구. 형부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상중이 읽고 있던 신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을 때 방금 일어난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반짝거리는 지연이 옆에 서있었다. 베란다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햇살 때문일까? 햇살을 머금어 빛나고 있는 투명한 피부 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향해 활짝 웃는 웃음 때문일까?
“얘가 또 왜 이래? 무섭게?”
도연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밝게 인사하는 지연이 낯선 것 같았다. 충분히 그럴 만 했다. 그건 상중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지만 어쩐지 지연의 그 기분 좋은 변화가 자기 때문인 것만 같았기에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중은 자신도 모르게 지어지려는 미소를 자제한 채 최대한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상중의 마음은 아랑곳 않는다는 듯 상중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때 지연의 가슴이 상중의 뒤통수에 닿았다.
노... 노브라?
“야, 형부 괴롭히지 말고 일어난 김에 밥 가져와서 같이 먹어. 북엇국 끓여놨어.”
“아, 진짜? 오예!”
지연이 평소보다 밝아진 것이 낯설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무언가를 의심할 만큼의 획기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여자의 기분이야 날씨처럼 홱홱 변하기 마련이니까.
지연은 밥과 국을 떠서 평소처럼 상중의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상중은 이미 지연이 밥을 푸고 있을 때 신문을 옆으로 치워놓은 참이었다. 식사를 같이 할 일이 많진 않았지만 식사를 할 때면 지연은 항상 그 자리에 앉았고, 도연 역시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처제.”
“네, 형부. 형부도 많이 드세요.”
평소에 나누던 것과 다름없는 자연스러운 대화. 딱히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도연도 두 사람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바라보았고, 피식 웃기까지 했다.
사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도연은 남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같이 살겠다고 들어온 동생이 불편할 만도 했을 텐데 상중은 까다롭기만 한 지연을 친동생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었으니까.
상중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도연은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아무런 의심 없이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도연의 신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상중이었기에 지연과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 죄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상중의 옆자리에 앉은 지연은 의자에 편한 다리로 앉아 있었다. 원래 같으면 위로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짧은 바지가 보여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허벅지가 다 드러나도록 하얀 살결만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언뜻 하얀색 팬티가 보일 뿐이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밥그릇을 볼 때마다 그 하얀 살결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연은 그런 상중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북엇국에 밥을 말아 열심히 먹고 있었다.
“난 먼저 갈게. 천천히 먹어 여보 그럼. 지연이 너 설거지 해놓고.”
“아침마다 내가 했거든? 새삼스럽게. 갖다와 언니.”
회사가 먼데다, 러시아워가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도연은 늘 그렇듯 숟가락을 먼저 놓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도연은 늘 상중보다 10분 정도 먼저 출근을 하곤 했다.
도연이 나간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침묵에 휩싸인 집안엔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순식간에 찾아온 어색함.
상중은 그 어색함 속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그 망설임을 알고 있는 지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바로 주무셨어요?”
“…한숨도 못 잤어.”
“그래 보여요. 치… 그럼 내 방에 놀러 오시지. 나 어제 형부 나가고 혼자 했단 말예요.”
지연이 시무룩해졌다.
상중은 지연을 다시 보았다. ‘혼자 했다’니. 처제는 그런 말이 아무렇지 않은 건가?
“처제… 다 좋아. 그런데 도연이 있을 때는… 참자. 난 도연이한테도 잘 하고 싶어. 잘 해야 돼.”
잠을 한 숨도 못 잤는데도 그의 정신은 또렷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놓아버린다면 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짐작도 못 할 거다.
“네. 알겠어요. 약속할게요!”
지연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고 새끼손가락을 불쑥 내밀었다. 상중은 마지못해 왼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런데 펴진 새끼손가락 바로 옆에 있는 결혼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손가락 말구, 오른손이요. 그래야 제대로 된 약속을 하죠.”
지연이 손가락을 뒤로 빼며 고개를 젓자 상중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걸었다.
“그럼… 지금은 언니 없으니까 안 참아도 되는 거죠?”
그 상태로 지연이 음흉한 눈빛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면서 몸을 완전히 돌려 다리를 완전히 가슴으로 모으면서 상중을 빤히 바라보았다. 헐렁한 티셔츠 위로 무릎에 한껏 압박된 가슴이 풍성한 모습을 드러냈다.
허벅지 아래도 훤히 드러났다. 가는 종아리 사이로 하얀색 팬티가 언뜻 보였다.
“형부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이렇게 입고 나왔는데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던 듯?”
상중이 아래로 내려가 있던 시선을 다시 들어 지연의 눈을 마주치려 했을 때 지연의 얼굴이 얼른 다가와 상중의 입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은 여전히 꼭 걸려 있었다.
―
출근길 지하철 안, 여지없이 콩나물 줄기처럼 꽉 들어찬 사람들 틈에 껴있는 상중은 평소의 짜증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실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옆에 딱 붙어 있는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여자가 상중을 이상하게 보았고, 하마터면 치한으로 몰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상중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평소 그를 못마땅해 하거나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싶을 정도였다.(그렇다고 실제로 인사를 한 건 아니었다.) 결재를 맡으러 온 직원들에게도, 결재를 하러 간 부장에게도 그는 평소엔 짓지 않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주위의 반응은 뜨거웠다.
“김 과장, 무슨 좋은 일 있어?”
퇴근을 코앞에 앞둔 시각, 마지막으로 커피를 한 잔 하는 휴게실에 모인 동료 하나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물을 정도였다.
“오늘 사무실 사람들 다 하루 종일 자네 얘기야.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말야.”
“좋은 일이라니? 달라 보인다고 내가?”
“그래. 평소랑 다르게 뭔가 밝아보인다고 할까? 혹시 승진 관련해서 무슨 얘기 듣기라도 했나?”
“내가? 승진? 그게 무슨….”
“아니, 자네 승진이 유력하다는 걸 미리 듣고 그러는 게 아닌가 해서. 그게 아니면… 아, 설마 와이프 임신이라도 한 거야?”
동료의 말을 들은 상중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특히 아내의 임신 이야기가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아침에 한 지연과의 입맞춤으로 자기도 모르게 하루 종일 마치 첫 키스를 했던 날처럼 들떠있었던 그였다. 왜 그게 그렇게 그를 들뜨게 했을까?
한 땐 아내도 출근하는 길에 입을 맞추어주었던 때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사라진 의식이었다. 아내의 임신이 연속해서 실패로 돌아가면서일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아내에게 더욱 더 잘 해줘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면서 모든 행동들이 부자연스러워진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잊고 있던 출근 전의 입맞춤. 그걸 지연이 해준 것이었다. 마치 신혼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좀 더 진한 것을 할 줄로만 예상했던 지연의 그 가벼운 키스가 아직도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상중의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
그러나… 퇴근길, 어쩐지 상중은 출근할 때와는 완전 반대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하루를 꼬박 새운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지만, 아무래도 몸이 예전 같지 않은 나이 마흔이 넘은 그에게 35시간 동안 잠을 한숨 자지 못한 건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집에는 아내도 지연도 없었다. 그는 간단하게 샤워만 하고 나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실 소파에 TV를 틀어놓은 채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