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의 일기장 (잠들지 않은 아내 그리고 어떤 기억)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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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처제의 일기장 (잠들지 않은 아내 그리고 어떤 기억) 14화
14화)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그 순간, 상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주로 떠오른 건 도연의 놀란 표정, 우는 표정, 화난 표정 등 다양한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그건 상중이 그동안 겪어왔던 도연의 표정들을 기억 속에서 퍼 올린 것뿐, 실제로 아내가 두 사람을 목격하게 된다면 상중이 떠올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을 것이 분명했다.
표정도 표정이었지만, 그 뒤에 벌어질 법한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도연은 아마 그대로 부엌에 가서 칼을 들어 자기 목을 그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상중과 지연을 찌를 지도 모른다.
아니다. 큰 일이 벌어질수록 의연한 태도를 유지해온 도연은 그러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다. 의외로 태연하게 상중과 결별하게 될 지도 모르고 어쩌면 상중과 지연을 용서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은 일생을 슬픔에 사로잡혀 살아갈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그건 앞으로 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릴 것이었다. 비극적인 상황은 절대로 연출되어선 안 됐다.
사람이 죽기 직전 떠올린다는 그런 생각들보다 더 밀집된 생각들이 상중의 머리를 쏜살같이 지나갔고, 상중은 그 생각 끝에 아무것도 모르고 무릎 위에서 입술을 물어뜯기 바쁜 지연을 떨어뜨리는 게 먼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행히 두 사람은 옷을 모두 입고 있었다. 지연과 그가 붙어있는 그림만 아니면 된다. 채 1초도 안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상중은 입술을 떼는 것과 동시에 지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면서 바로 지연을 원래 있던 쪽으로 거의 내던지다시피 해서 눕혔다.
생각 외로 식은 죽 먹기보다 간단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완벽한 계획이었다.
“아야!”
지연은 넘어지면서 머리를 나무 상에 찧고 말았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잘 된 거였다. 그 바람에 상이 거의 넘어지다시피 했고, 지연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처제, 괜찮아?”
상중은 더 과장돼서 소리쳤다. 연극 하는 사람 같이. 아내가 눈을 부비면서 모습을 나타낸 건 그 때였다.
“으이구 잘한다. 저건 술만 먹으면 저러더라. 그만 먹이고 재워요 여보.”
아내는 비틀거리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술을 먹으면 자면서도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는 아내의 습관.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
상중은 거실 TV장에서 응급 상자가 원래 있던 자리를 바쁘게 뒤져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1년에 한 번 쓸까 말까한 응급 상자를 꺼내본 지가 3년도 더 된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있을 만 한 곳을 아무리 뒤져봐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10년의 결혼 생활 동안 상중과 도연에게 응급을 요하는 순간이 별로 없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썼던 게 3년쯤 전인가 모기에 물려 발랐던 물파스였을 정도니까.
쓴 적이 없으니 그건 당연히 거기에 있어야 했다. 발이 달린 게 아닌 다음에야 혼자 어디 갈 리도 없잖은가. 그런데도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지니 찾았던 곳만 계속 뒤져대고 있었다.
밤중이라 문을 연 약국도 없는데 119라도 불러야 하나? 그런 생각이 서서히 떠오르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거의 10분을 넘게 찾다가 상비약이 나온 건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장소였다.
냉장고 안.
그가 왜 냉장고를 열어본 건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소파 밑이라든가 베란다라든가 화장실 장이라든가 냉장고 위라든가 하는 곳을 다 뒤져보다 보니 손에 닿은 게 냉장고 문이었다. 물 먹을 때 빼곤 열 일이 없는 곳이었지만 손에 잡힌 김에 열어본 참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냉장고 안 눈에 잘 보이는 맨 위 칸에 그렇게 애타게 찾던 것이 떡하니 있었다.
도연이가 설마 치매에 걸린 건가? 상중은 생각했지만, 그건 다음 일이었다. 주부의 건망증이야 흔한 일이라고 들었으니까.
어쨌든 급하게 상자를 꺼내서 뒤를 돌아서는 그 순간, 언젠가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약도 유통기한이 있대. 자주 쓰지 않으니까, 냉장고에 넣어둘게.”
결국 도연이 아니라 상중의 기억력이 문제였다. 오래되고 쓸모없는 기억들은 저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드리워진 낚싯줄 하나에 이끌려 줄줄이 딸려 나오기 마련이다.
―
지연은 자기 방 침대 위에서 색색거리며 잠이 든 것 같았다. 상중이 부축해서 눕혀 놓은 그대로인 듯했다. 감긴 눈에 처마처럼 드리운 긴 속눈썹이 먹을 빨아들인 붓처럼 진해져 있었다.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은 그는 약을 발라주려고 온 것도 잊고 살짝 부은 지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연의 얼굴을 마주하는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에도 지연의 얼굴은 자체적으로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아내 도연과 미세하게 다른 부분은 콧망울과 입술, 그리고 눈썹 정도였다. 그 작은 차이들로 인해 지연은 도연보다 도시적이고 서구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배까지 덮은 이불 바로 위로 솟은 탄력적인 가슴도…
상중은 정신을 차리고 상에 부딪친 이마를 확인했다. 머리칼로 덮인 왼쪽 이마 가장자리 쪽 부분이 아까보다 심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더 빨갛게 되어 있었다.
처제는 왜 나에게 이토록 매달리는 걸까? 처제 정도면 분명히 좋은 남자를 만나서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관계의 끝이 좋을 리가 없는데.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인데….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지연을 그렇게 내던지듯 매다 꽂아버린 게 상중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상처 부위에 번들거리는 약을 펴 바르는 손길은 여린 음핵을 애무하듯 조심스러웠다.
약을 다 바르고 손을 거두려는데 잠든 줄 알았던 지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다….”
눈을 반쯤 뜬 지연이 상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처제….”
“뽀뽀라도 해줄 줄 알고 가만있었는데….”
지연의 마른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농담할 기운이 있는 걸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언니한테 안 들켰어요?”
지연을 레슬링 하듯 매다 꽂기까지 했는데도 들켰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상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연의 손이 천천히 다가와 그의 손을 힘없이 붙잡았다.
“가볼게. 도연이 맥주 먹으면 자다가 자주 깨.”
상중이 응급상자를 주섬주섬 챙기는 것을 빌미로 손을 뿌리쳤지만, 일어나면서 처제의 눈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반밖에 못 뜨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상중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 눈은 상중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듯했다. 상중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지연의 얼굴이 환해져 있었다.
“잠깐만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지연의 그 말이 들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방금 전에 나왔었으니까 바로는 안 나올 거 아녜요?”
날개 꺾인 새처럼 누워있는 지연이 몸을 돌려 옆으로 누우며 말을 했다. 그 한 마디 말이 순식간에 낚싯줄로 변했고,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아니, 구겨져있었던 기억 하나를 낚아채 끄집어냈다. 자의든 타의든 이제껏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았던, 떠올려지지 않았던, 잊었던 기억이었다.
―
3년쯤 전, 상중이 살면서 술을 가장 많이 먹은 날이었다. 상중이 그렇게 술을 많이 먹은 것은 꼭 도연이 계모임으로 동남아 여행을 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력했던 진급심사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세 병이나 마셨다.
몇 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로 전국이 마비될 지경이 되었던 그 날, 상중은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간신히 이겨내고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그 눈보라를 헤치고 걷지도 못했으리라.
맞이할 사람 없는 집 앞에는 누군가가 길 잃은 강아지처럼 쭈그려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형부… 왜 이제와요…”
찬바람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얼굴이 벌겋게 된 지연이 힘겹게 고개를 들고 말을 걸었다. 녹은 눈으로 젖은 두꺼운 코트 위로 내민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빛이 나고 있었다.
그 때 그를 올려다보던 지연의 얼굴이 도대체 왜 이 순간 떠오른 건지, 그리고 3년 밖에 안 된 그 기억을 어떻게 지금껏 잊고 있었던 건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