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제안 15장. 경고 / 16장. 꽃 한 송이의 힘 20화
무료소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거부할 수 없는 제안 15장. 경고 / 16장. 꽃 한 송이의 힘 20화
찌는 듯한 무더위였지만 사무실 안에서는 그런 걸 느낄 수가 없었다.
무덥고 냄새나는 자취방과 도서관에 가기 위해 걸어 다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너무나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나에게 생긴 변화를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지훈 씨, 실장님 콜~”
“네.”
오 실장의 방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장님, 부르셨어요?”
“어 들어와. 앉아…… 신성로지스 건 어떻게 됐어? 잘돼 가?”
“네. 지시하신 대로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근데 정말 나중에 문제 되지 않을까요?”
“걱정하지 마. 우리나라 검찰들이 몰라서 수사를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해? 절대로 아니지! 수사 의지가 있는 사건만 수사를 하는 거야. 그 수사 의지를 무너뜨리는 일을, 우리가 그저께 저녁에 한 거야.”
며칠 전 모 지검장, 검찰청 실세라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진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지금까지 살면서 듣고 본 모든 술자리 중에, 가장 더러운 장면들을 목격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게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말씀하십시오.”
“내가 말이야. 앞으로는 자네한테 프리롤을 맡길 생각이야.”
“프리롤이요?”
말 그대로하면 자유로운 역할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주로 스포츠에서 쓰이는 용어이기도 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아무 곳에나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앞으로는 회사에서는 그대로 직무를 수행하고 출장 갈 때나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날 수행하는 거지.”
“저야 실장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내가 막 부려 먹겠다는 거 아니니까 겁먹지 마.”
“네.”
“내가 회장님한테도 일 잘하는 친구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주 궁금해 하셔. 올라가서 인사나 하고 와.”
그가 나가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지금이요?”
“어, 지금. 올라가 봐. 한 층 더 올라가면 돼. 근데 표정이 왜 그래? 회장님 만나라니까 긴장돼?”
“네, 조금.”
“직접은 처음 뵙지?”
“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가서 인사드리고 와. 연락해 둘게.”
“다녀오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볼 거였으니까 차라리 먼저 매를 맞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회장님이 계신 곳에 도착하니 회장실 앞 여자 비서 세 명이 날 반겨 줬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스튜어디스처럼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여자가 내게 물었다.
“미래전략실 유지훈이라고 합니다. 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전화를 걸자 잠시 후 안에서 이 비서가 걸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가 날 안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탁 트인 조망을 바라보고 있는 송 회장이 있었다.
“회장님. 유지훈 사원 왔습니다.”
송 회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앉아요.”
그녀가 웃으며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교장 선생님 앞에 앉은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잘 지냈어요?”
“네. 덕분예요.”
“오늘 아침에 며늘아기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어떤……?”
이럴 때는 살짝 모르겠다는 제스처와 약간의 연기가 필요했다.
“이번 달에는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네요.”
“죄송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할 겸 부르려고 했는데, 오 실장이 먼저 한번 만나 보라고 하네요. 지훈 씨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어요. 일을 아주 잘한다고?”
“과찬이십니다.”
“많이 도와줘요. 적이 많고 친구가 없는 아이니까…….”
“네.”
“한 동 안 힘들지 않았어요? 며늘아기가 잘 따라 주던가요?”
“네,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 아이, 좀 차갑지 않던가요?”
송 회장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나 약간의 연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네, 조금…….”
“인위적인 것들은 지양해야 한다고 해서 임신 진단 같은 걸 할 땐 한의학을 이용할 거예요. 근데 의사가 그러더라구요. 최대한 심신의 안정을 취하게 해 주라고…….”
“네.”
“그래서 내가 걸었던 일주일에 두 번 중 한 번을 지훈 씨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편하게 모든 걸 생각하면 곤란해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일이에요. 둘 사이에 어떤 감정도 개입되어서는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죠?”
“네.”
“그 아이는, 우리 아들에게 장난감 같은 아이예요. 장난감답게 남들에게 보일 때는 그 어느 것보다 깨끗하고 빛이 나는 상태로 있어야 해요. 그런데 어떤 형태로든 흠집이 나거나 더러워진다면……?”
송 회장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할까요?”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버려야죠.”
“…….”
“다른 누구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짓밟아서 버려야죠. 내 아들의 장난감을 망가뜨린 사람도 함께…….”
16장. 꽃 한 송이의 힘
나와 유연 씨와의 관계를 알아차린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낸 건 사실이다. 송 회장의 마지막 말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웠다.
유연은 태양그룹 송 회장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아들의 아내였다. 유연에게 생기는 그 어떠한 일도 오 실장과 무관할 수는 없었다. 송 회장은 그걸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일을 하는 내내 송 회장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녀였다. 그리고 나 같은 피라미 한 마리를 겁주자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도 슬슬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야 할 것 같았다.
퇴근시간이 되자 제일 먼저 사무실에서 나왔다. 유연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나도 참 단순한 놈인지, 조금 전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그녀를 생각하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시동을 걸고 음악을 틀었다. 지금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과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내러 가는 것이다.
우회전을 하기 위해 길가 쪽으로 차선을 바꿨는데 때마침 눈에 띄는 꽃집이 하나 있었다. 서둘러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 살기 팍팍한 사람들이 가장 하지 않는 선물이 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먹어도 배부르지도 않고 소장 가치도 없는 선물이 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면 시들어 버리기까지 하는 아무 쓸모없는 것. 그게 나에게는 꽃이었다.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연예인이니까 수많은 꽃을 받았겠지? 그래도 뭐 내가 사주고 싶으니까…….’
차에서 내려 꽃집으로 들어갔다. 거리는 온통 찜통 수준이었지만 꽃집 안은 시원했다.
“어서 오세요.”
“꽃 좀 주세요.”
“누구한테 선물하실 건가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푸근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꽃이라고는 장미와 국화 정도에 불과했다. 꽃을 사 본 적이 없으니 꽃 이름 같은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때 꽃 집 벽 쪽에 걸린 액자에 눈이 갔다. 액자 안에 있는 노란 장미가 예뻐 보였다.
“저거 주세요.”
내가 액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라도 장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노란 장미요?”
“네. 그거.”
노란 장미가 맞았나 보다. 그런데 주인 여자의 표정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죄송합니다, 손님. 노란 장미가 지금 딱, 한 송이밖에 없네요. 오늘 이 근처에 행사가 많아서 그런지 유난히 장미들을 많이 찾으시더라구요. 빨간 장미도 다 떨어졌고 노란 장미도 남아 있는 게 한 송이밖에 없어요.”
“아…… 그래요?”
누가 노란 장미를 사라고 시킨 건 아니었지만 일단 사기로 마음먹었는데 없다니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걸로, 드릴까요?”
주인 여자가 다른 꽃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가 직접 골라서, 꽃을 사 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데 내 마음에 없던 걸 가져다주고 싶지가 않아요…….”
“아~ 그러시군요.”
주인 여자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한 송이라도 싸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포장해서 드릴게요. 받으시는 그분도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예요.”
한 송이만 산다고 해서 싫어 할 줄 알았지만 주인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꽃을 파는 사람은 마음도 좋은가 보다.
값을 치르고 노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차로 돌아왔다. 한 송이의 장미를 손에 들고 있을 뿐인데 이 뿌듯한 감정은 뭘까…….
이 꽃을 받은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조금이라도 늦을까 싶어서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서둘러서 운전을 했다. 도착해서도 혹시라도 이 비서가 이상하게 볼까 봐 재킷 안에 장미를 숨겼다.
여느 때처럼 이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고 통과의례처럼 카메라를 받아 들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자 내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1초라도 더 빨리 그녀를 보고 싶었다.
똑.
두 번 하던 노크도 한 번으로 생략하고 바로 문을 열었다. 늘 그 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이제는 나를 보고 살짝 미소 짓기까지 한다.
“안 들어오고 뭐 해요?”
“갑자기 모든 게 너무 거짓말 같아서요. 신기하고.”
내가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내가 문을 딱 열었는데, 유연 씨가 살짝 웃고 있는 거예요. 이런 그림을 항상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내가 그걸 볼 수 있잖아요.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거짓말 같은 일인지 모를 거예요.”
“정말 나를 로봇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처음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렇게 예쁜 로봇이 어디 있겠어요?”
유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슬며시 다가가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녀가 내 행동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받아요…….”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꽃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조금 놀란 듯하면서도 복잡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다. 그리고 또 그녀의 눈가에 금세 이슬이 맺힌다.
기분 좋으라고 한 선물에 그녀가 눈물을 비치자 오히려 더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왜, 왜 그래요? 혹시 꽃 알레르기나 한 송이라 실망해서 그래요? 알레르기면 빨리 약을 먹어야 하고, 실망한 거면 내가 다음번에 더 큰 걸로 사 줄게요. 100송이. 아니, 200송이.”
그녀가 아닌 척 슬쩍 눈물을 훔쳐 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나도 지훈 씨처럼 거짓말 같고 신기해서 잠깐 눈물이 났어요. 옛날 생각도 나고.”
“유연 씬 뭐가 신기한데요?”
“그때는 팬들이 항상 꽃을 많이 줬어요. 그리고 어느 시상식을 가도 항상 꽃들이 옆에 있었어요. 그때는 너무 흔하고 빨리 시들어 버리는 그런 것들이었죠.”
“그런데요?”
“결혼을 하고 나니까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없어지더라구요. 당연히 지금 집에는 여전히 꽃들이 넘쳐 나죠. 매일 차로 많은 꽃들을 실어 와서 집안 여기저기를 장식 하니까요. 그런데 그중에 나를 위한 꽃은, 하나도…… 없더라구요. 아~ 이제는 아무도 나한테 꽃을 주지 않는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구나…… 다시는 누군가에게…… 꽃을 받을 수 없겠구나…… 그런 느낌?”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표정이 서글퍼 보였다.
“그럼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이제부터 내가 자주 사 줄 거니까~”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사실 꽃집에 갔는데 내가 꽃을 사본 적이 있어야죠, 꽃이라고는 장미밖에 모르는데 거기에 노란색 장미로 된 액자 같은 게 벽에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딱 찍었죠. 그런데 주인아줌마가 이건 한 송이밖에 없다는 거예요. 근처에서 무슨 행사가 있었다나? 그래서…….”
“크흑…… 흐흐, 푸흐흡…… 흐흐흐흣…… 흐흐, 하하하.”
“유연 씨?”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던 그녀가 급기야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크게 웃어 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왜 웃는지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지만 행복했다.
“흐흐…… 흐흑, 흐하…… 풉…… 하아…… 미안해요.”
얼마나 웃었는지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웃음 포인트가 어디인지 나한테도 이야기해 좀 해 주면 안 돼요?”
“푸웁…… 그게 지훈 씨가 꽃집에서 있었던 일을 다다다닥 이야기하는 게 꼭 아줌마 같아서…… 프흐흐…….”
“난 또 뭐라고?”
“너무 웃어서 배가 아파요.”
“많이 웃어요. 내가 좋아하는 유연 씨 모습 중에 가장 최고가 웃는 모습이에요.”
“그랬어요?”
그녀의 표정이 한결 밝아 보였다.
“그럼 내 모습 중에 두 번째로 좋아하는 모습은 어떤 건데요?”
유연이 턱을 괴고 궁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게…… 말해도 돼요?”
“그럼요. 못 할게 뭐가 있어요?”
“그게…… 좀, 야해서…… 아주 많이…….”
내가 생각해도 좀 징그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내보였다.
“그, 그럼, 하지 마요.”
“아니, 조금 전에는 하라고 해 놓고, 왜 지금은 또 하지 말래요?”
“야……하다면서요?”
“그게 뭐 어때서요, 오늘도…… 할 건데?”
“그래두요.”
수줍어하는 그녀가 아직 소녀 같았다. 그런 점이 나에게는 오히려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만 침대로 갈까요?”
그녀가 수줍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번쩍 안아 들었다.
“어머, 왜 그래요?”
“이런 건 연기로 숱하게 해 봤을 텐데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요?”
내가 장난치듯 슬쩍 핀잔을 주었다.
“연기가 아닌 건 처음이니까…… 그렇죠.”
“진짜요?”
살며시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한 꺼풀씩 그녀의 옷을 벗기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도 예전처럼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때때로 나와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로 다가갔다. 내 입술이 닿기 전 그녀가 날 불렀다.
“지훈 씨…….”
“왜요?”
“고마워요…… 꽃.”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그녀의 혀가 내 입술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