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제안 38장. 죽음 / 39장. 친구라서…… (1) 42화
무료소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거부할 수 없는 제안 38장. 죽음 / 39장. 친구라서…… (1) 42화
말을 하고 유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누구나 다 각자의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그때의 유연은 너무 어렸던 것 같다.
“그때는 유연 씨도 어렸잖아요. 자책하지 말아요.”
“그러게 갑자기 왜 엄마 이야기는 꺼내서…….”
“미안해요.”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 두는 건데, 우리 엄마 되게 착해요. 사람들이 얘기하는 계모처럼 자기 배 속으로 낳지 않았다고 구박하고 그런 사람 아니었어요. 오히려 맨날 당하기만 하고…… 혼자 울고…….”
“말 안 해도 알아요~”
“그건 진짜 엉터리다.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요?”
“왜 몰라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거지. 유연 씨가 이렇게 예쁘고 착한데, 어머님이 어떻게 그렇지 않으실 수가 있겠어요? 똑같이 예쁘고 착하시겠지…….”
“헤헷…… 하여간 이럴 때 보면 정말 말을 잘하는 것 같아.”
“우리 엄마도 되게 예뻐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착하고 잘생겼지~”
“어머~ 자기 자랑?”
“유연 씨도 아까 자기 자랑 했잖아요? 몸매 자랑~!”
“못 말려~”
“이제 슬슬 정리하고 일어날까요?”
“아, 그리고…… 어머니 만났죠?”
“네. 나는 임신 안 돼서 되게 독촉 받거나 꾸지람들을 줄 알고 갔는데, 의외로 우리에게 더 좋게 되어서 놀랐어요.”
“저두요. 갑자기 배란일에 맞춰서 아무 때나 가서 만나도 된다고 하시길래 갑자기 왜 그러시나 했거든요…….”
“뭐가 그렇게 급한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머니가 급한 게 저희한테는 잘된 거잖아요? 나는 유연 씨를 좀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잘됐죠, 뭐.”
“그리고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유연이 살짝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떤 거요?”
“아니, 뭐 그냥 다른…… 요구사항 같은 게 있으셨나 해서요…….”
물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굳이 유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봤자 걱정만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건 없었어요. 유연 씨는 마음 편하게 가지고 있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이제 진짜 가야겠어요. 준비해요.”
“맨날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게 너무 싫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다시 나에게 안겨 왔다. 허리에 팔을 두르고 내 가슴에 뺨을 갔다 대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응석 아닌 응석이었다.
그럴 땐 나도 가만히 그녀를 안아 준다.
***
일요일 아침부터 알람 소리가 요란했다. 알람 설정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두 되어 있어서 덕분에 아침 일찍 깨야 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유연과 함께 있었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잠이나 더 자 둬야 했다.
하루 종일 먹는 둥 마는 둥 집안에서 뒹굴거리다 보니 금방 해가 저 버렸다. 이전보다 훨씬 좋은 집에 살고 있고 돈도 풍족하지만 잘 못 챙겨 먹는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지만…….
대충 옷을 챙겨 입고 편의점으로 나갔다. 여긴 꽤 잘사는 동네라 편의점도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평생 함께 해야 할 것 같은 컵라면과 냉동식품 몇 개를 사가지고 편의점을 나오는데 어떤 꼬마애가 나에게 와서 부딪혔다.
“야, 꼬마야 조심해서 다녀야지…….”
“죄송합니다…….”
아이가 머리를 숙여 나에게 인사하는데 멀리서 엄마처럼 보이는 사람이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문을 여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서 마담의 아이는 괜찮은 걸까? 이렇게 궁금해하는 것조차 주제넘지만, 의사가 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오늘 내일 중으로도 위급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한번 가 봐도 될까……?’
결국 가 보기로 결정을 했다. 병원에 가는데 너무 편한 차림으로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뒤져 보니 또 입을 만한 캐주얼이 별로 없었다. 할 수 없이 출근할 때 입는 옷을 그냥 꺼내 입었다. 서 마담도 나의 그런 모습이 가장 익숙할 테니까.
차를 몰아 세한병원으로 갔다. 혹시라도 또 그녀가 밥을 먹지 않고 있을까 봐, 가다가 일식집에 들러 초밥을 한 세트 주문했다.
주차장 구석에 차를 대고 중환자실이 있는 곳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도착해 둘러봐도 서 마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환자실에는 면회 시간이 따로 있었는데, 그녀가 계속 거기에 상주할리는 없었다. 이런 생각은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다시 돌아갈까 아니면 서 마담에게 전화를 해 볼까 고민하는 사이, 간호사 한 명이 나왔다.
“저기 실례합니다…….”
“네 무슨 일이신지…… 혹시 면회 오셨어요? 그런데 면회는 지금 시간이…….”
“그럼…… 환자 상태는 좀 알 수 있을까요?”
“누굴 찾아오셨는데요?”
“현우요…… 꼬마아이요…….”
성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현우……요……?”
간호사가 왠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어디가 안 좋은가요?”
“그것보다 환자분과 어떤…… 사이세요?”
“네, 그…… 현우 엄마의 친구……입니다. 서혜진 씨요…….”
그녀의 이름을 이야기하자 그제야 간호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의심의 눈초리를 버렸다.
“현우 어머님한테 연락 안 해 보고 오셨어요?”
“네, 급하게 어디 좀 다녀오느라…….”
“아직 이야기 못 전해 들으셨나 보네요…….”
“뭘…….”
“엊그제 저녁 11시경에…… 다시 쇼크가 와서…… 사망했어요…….”
“잠, 잠깐만요…… 사망이라뇨? 현우가요?”
“네, 안타깝게도…….”
“그럼 지금 현우는 어디 있습니까…… 아이 엄마는요……?”
“건물 옆에 있는 별관에 저희 병원 장례식장이 있거든요. 거기로 옮긴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럼…….”
간호사가 떠나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직 그렇게 어린아이가 죽어야 한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서 마담에게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일단은 그냥 찾아가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을 텐데 전화를 한다고 해서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병원 건물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금방 장례식장이 보였다. 밖에는 몇몇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여러 개의 이름 중 ‘서현우’라는 이름이 보였다.
39장. 친구라서……
‘현우…… 서현우? 엄마의 성을 땄구나…….’
장례식장은 여러 개의 빈소로 나눠져 있었다. 다른 빈소는 다들 입구부터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지만 딱 한 군데만은 예외였다. 아무것도 없이 입구부터 썰렁한 그곳이 현우의 빈소였다.
지나가는 여자들이 현우의 빈소를 지나가며 뭐라고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내일이면 발인인데…… 저기는 한 명도 안 찾아온 것 같아…… 뭐 하는 사람이길래…… 얘가 죽었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어?”
“그러게 말야…… 얘기 엄마도 아직 젊던데…….”
“저렇게 한 명도 없는 집은 처음인 것 같아…… 무슨 사연일까…….”
“모르지 뭐…… 손님이 아무도 없으니까 분위기도 으스스하다…….”
‘자기 일도 아닌데 저렇게 생각 없이 맘대로 떠들어 대다니.’
이상하리만치 썰렁하고 조용한 빈소로 들어갔다. 당연히 손님들을 맞이하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이의 사진과 그 앞에 상복을 입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서 마담이 보였다.
그녀는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혜진 씨…….”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서 마담이 퉁퉁 부은 눈으로 올려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긴 어떻게…….”
“생각이 나서 들러 봤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현우가…… 흑, 윽…… 흑흑…….”
“혜진 씨…….”
그녀는 그대로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서 마담이 내 팔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으…… 으윽…… 끄으윽…… 으아아…… 으어…… 으으어…… 흐흑…….”
서 마담은 자신의 가슴을 내리치면서 통곡했다.
“혜진 씨…….”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 어떤 위로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녀의 옆에 앉아서 함께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 후로도 한동안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요?”
“미안해요, 지훈 씨…….”
“정말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고, 마워요…… 지훈 씨. 우리…… 현우, 못난 엄마 만나서…… 이렇게…… 마지막까지 너무 외롭게 혼자 보낼까 봐 걱정했는데…… 정말 고마워요…… 지훈 씨 덕분에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맙긴요. 제가 좀 더 일찍 와 봤어야 했는데 늦게 와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뭐 좀 먹었어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인 것 같았다. 억지로 서 마담을 데리고 나왔다.
정상적이라면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서 서 마담과 함께 식사를 했다.
“좀 더 먹어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힘내야죠.”
“충분히 먹었어요…….”
“내일이 발인이죠?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화장할 거예요, 갑갑한 병원에 너무 오래 있었거든요. 이제 더 이상 갇혀 있지 않아도 되니까 자유롭게 다니라고 뿌려줄 거예요. 그럼 어디든 마음껏 다닐 수 있잖아요.”
서 마담이 씩씩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겠네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이제 그만 가봐요.”
“같이…… 있을까요?”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오늘 저녁은…… 우리 아들과…… 오붓하게 보내야죠…….”
“내일 잠깐 들를게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왜요? 나도 아까 사진 보고 현우랑 인사했어요…… 아주 잘생겼던데요? 오게 해 줘요.”
“바쁠 텐데…….”
“괜찮아요. 오늘은 아들과 보내고…… 저는 내일 올게요.”
“고마워요…….”
사고무친에 다른 친구들도 없는데 혼자 아들의 발인까지 치르려면 그녀 혼자서 얼마나 쓸쓸할까 싶어 별 사이 아닌 나라도 함께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한여름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단비겠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에겐 그처럼 슬픈 비가 아닐 수 없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잠시 사정을 말하고 반차를 써서 화장장으로 갔다. 서 마담은 여전히 퉁퉁 부은 눈으로 날 맞이했다. 며칠 사이에 너무 수척해져 버린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왔어요?”
“네. 힘들었죠?”
그녀는 그냥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뜨거운 화마가 아이를 삼키자 애통한 혜진이 또 한 번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소리 지르고 악을 써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게 엄마의 마음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 또 한참을 울고야 말았다.
한 시간여가 더 흐르고 그녀의 아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다시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아들의 유골함을 끌어안고 또 한참을 울었다.
남은 절차들을 다 생략해 버리고 그녀가 유골함만을 가지고 나왔다.
“어디로 갈 생각이에요? 태워다줄게요…….”
“괜찮으시면 한강둔치까지 좀 태워 주세요.”
“알았어요, 가요.”